See What I Wanna See일시 : 7월 17일 오후 8시
장소 :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캐스팅 : 양준모, 차지연, 강필석, 정상윤, 박준면
작품 시놉시스를 가장 먼저 접했을 때 일단 떠오른 것은 '왜 하필 이 작품일까'라는 뜬금없는 의문이었다. 얼마 전까지도 연극 《나생문(羅生門 ; 이하 '라쇼몽'으로 통일)》이 국내 무대에서 공연되었었다. 원작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유명한 단편 「덤불 속」이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 역시 걸작의 반열에 올라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뮤지컬이란다. '뮤지컬 = 대사를 노래로 처리한 연극'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 아닌 만큼, 뮤지컬에서 음악이란 단순한 대사처리나 분위기 전환용이 아니라 어떤 목적의식 내지는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적절히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루나양으로서는 뭐든지 장르화하는 것을 좋게 볼 수만은 없다. 게다가 뮤지컬에 잘 어울리는 장르인 멜로드라마와는 명백히 거리가 먼 작품이니 의아할 수밖에. 그래서 반은 호기심에, 반은 배우 욕심 ㅡ 앞으로 양준모 씨 출연작은 모두 보기로 《스위니 토드》 이후 다짐해놓은 것이 있어서 ㅡ 에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
<라쇼몽> 이야기를 먼저 꺼내긴 했지만, 이 작품의 구성은 다소 특이하다. 막이 시작될 때 <케사와 모리토>가 각각 케사와 모리토의 시선에서 비춰지고, 1막은 <라쇼몽>, 2막의 나머지는 <영광의 날>로 끝난다. 게다가 무대 구조 역시 특이해서, 객석 중앙에 정방형의 무대가 있고, 관객들은 연기 중인 배우뿐만 아니라 무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배우까지 볼 수 있다. 휑한 무대에는 몇 가지 소품과 희고 붉은 조명만이 존재하고, 사방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영상이 떠오르는데, 각 면마다 다른 영상을 보여주는 고로 자신이 앉은 면의 화면은 볼 수가 없다. 주제를 암시하는 은유적인 장치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1막의 <라쇼몽>은 ‘남편’의 죽음을 둘러싼 남편, 아내, 강도 세 사람의 각기 다른 증언을 통해 진실과 거짓의 상대성을 다루고 있다. ‘한 남자가 공원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은 그 아내를 탐한 강도와 관련이 있다.’ 여기까지는 세 이야기 모두 같다. 그러나 같은 죽음을 둘러싸고 강도는 자신이 살해했다고 하고, 아내는 동반자살을 기도하느라 자신이 찔렀다고 하며, 남편의 영혼은 자살이라고 말한다. 설상가상으로 시신을 발견한 극장 경비는 자꾸 중언부언 증언을 번복한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주장하지만 관객은 알 수가 없다. 죽은 자는 진실을 말했을 것 같지만 글쎄, 이미 앞선 증언들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는 것을 본 관객은 그것조차 의심하게 되고, 무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막을 내린다. 결국 작품명대로 알아서들 생각하라는 이야기다. 곁다리로, 등장인물들은 부부가 그 날 보았다는 일본 영화를 반복해서 언급하는데, 그게 바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라는 사실이 재미있다.
1막에서 아쉬웠던 점은 이 작품의 한계를 눈에 띄게 드러내는 ‘아내’라는 캐릭터의 대상화였다. 세 사람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진실은 그들이 보는 ‘아내’의 태도에 지나치게 좌우되는 경향이 있었다. 인물들의 시각에 따라 남편과 강도의 캐릭터에는 별로 변화가 없는 반면에, 아내는 '강간을 당하고 남편을 잃은 가련한 여인'과 '욕망을 좇아 남편을 배신한 살기등등한 여인' 사이를 극단적으로 오간다. 원작을 읽는 독자는 행간의 의미를 찾아내려 작품을 곱씹기 때문에 성급하게 이런 인상에 빠져드는 경향이 적고, 영화 《라쇼몽》에서는 마지막에 제3자인 나무꾼의 시각을 더하여 무력한 남편의 비겁함, 강도의 탐욕, 아내의 숨겨진 욕망을 고루, 한층 심도 있게 간파해낼 수 있었다는 점과 대조된다. 더욱 불편한 것은 이러한 대상화가 어쩌면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선정적인 붉은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아내’는 치마 길이까지 바꿔가며 강도의 시선에, 관객의 시선에 자신을 아낌없이 내보인다. 관객의 무의식에 방향성 있는 선명한 인상을 심어주고서 진실과 거짓의 상대성을 논하는 건 자가당착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2막의 '영광의 날'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다른 단편 「용」을 각색한 것이다. 원작은 용이 승천하리라는 거짓 예언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실제로 그 앞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내용인데, 911 테러 이후 회의감에 시달리던 신부가 거짓으로 기적을 예고한다는 내용으로 각색했다. 그런데 루나양만 느낀 건지 모르겠지만, 어째 배경을 센트럴 파크로 바꾸고 기독교적인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놓으니 왠지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의 냄새가 강하게 났다. '믿음은 진실을 창조한다' 정도의 메시지를 발견.
처음의 의문으로 되돌아가서, 같은 소재를 다룬 다른 장르에 대해 뮤지컬 《See What I Wanna See》은 무엇을 강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지에 관해 생각해본다. ‘차세대 손드하임’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는 라키우사의 작품은 처음 접하는 것인데, 확실히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을 엮어 뮤지컬로 만들 생각을 한 대목에서부터 소재를 선택하는 안목이 범상치 않음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작품 목록에는 마르케스, 로르카, 베르히만도 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 작품으로 접한 그의 음악은 듣기에 편하지는 않다. 유명한 뮤지컬 넘버처럼 착착 감겨드는 멜로디나 쉽게 다가오는 가사 같은 건 없다. 단지 장르 불명의 현대적인 테마가 서술자의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으로 변용되며 작품의 주제에 녹아들어 일체가 되는 과정 하나만 보아도 음악 있는 연극과 차별화되는 점을 바랐던 루나양을 만족시킬 만 했다. 뮤지컬로서 음악은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그 자체로서 작품의 존재 가치를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와 뗄 수 없이 얽혀 ― 이 작품은 특히 연극적 요소가 강하다 ― 작품의 중심 메시지와 밀착한다. 그야말로 단순한 ‘뮤지컬’이 아니라 ‘종합 무대 예술’이라는 느낌.
배우들 연기는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양준모 씨는 의외로 노래하는 부분이 적었지만 역시 그 웅장한 목소리는 어디 가지 않았다. 1막 후반부의 영매와의 이중창이 가장 인상 깊었고, 작품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으로 기억한다. 시각적인 분위기는 전혀 달랐지만 영화 《라쇼몽》의 목소리와 겹쳐 들리며 그 영상을 떠올리게 했고, 동시에 원작을 읽고 있는 느낌을 주었으니 가히 1막뿐 아니라 작품 전체를 집약한 정점이었다고밖에. 차지연 씨는 가사 전달에 조금 문제가 있었지만 연기 자체는 훌륭했다. 단지 위에서 언급한 문제 때문에 관객에게 다양한 인상을 주는 데에는 실패한 듯. 박준면 씨는 영매와 이모 역을 모두 거뜬하게 소화해냈는데, 이 분 노래는 박력 있으면서 캐릭터에 착 맞아떨어져서 좋았다. (+ 안경 쓴 강필석 씨는 명탐정 코난 같아서 귀여웠다.)
끝으로 뱀발. 2004년 작인 이 작품은 그동안 해외 뮤지컬이 국내 라이센스 공연으로 들어오기까지 걸렸던 평균적인 기간에 비하면 굉장히 빨리 소개된 편이라서 이색적이다. 《이블 데드》같은 공연도 그렇고, 요즘 들어 그 기간이 짧아지고 있는 것 같아서 기쁘게 생각한다. (라이센스 공연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대사가 조금만 더 자연스러웠다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작품이기는 한데 대중적인 친근함은 떨어지기 때문에 《쓰릴 미》처럼 재공연되거나 《지킬 앤 하이드》처럼 우려먹을만한 작품은 아니다. 아마 이번 기회를 놓치면 국내에서 근시일 내에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관심 있는 분이라면 지금 관람하시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