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원론 레폿 쓰기 싫어서 뭉기적거리고 있다가 레폿이라는 것을 써본 지 백만 년(작년 겨울에 쓰고 안 썼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전에 썼던 레폿들을 꺼내서 훑어보는데 이런 것이 나왔군요. 지난 해 <환상 문학의 세계> 수업에 제출했던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 비평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아 새삼 부끄러워지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부분도 있어 발췌하여 올려둡니다. 큰 목차 넷 중 둘째 부분입니다. (각주는 인용주만 괄호 안에 간략하게 표시함으로 대체하였음.)
(전략)
문학은 일차적으로 음악과 함께 시간적인 예술의 범주에 속한다. 특히 소설이 인간 체험의 한 측면을 드러내어 보여준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소설의 주제와 형식이 시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문학의 주제는 삶의 진행,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간에 시간 속에서 진행되는 사건, 시간 속에 위치해 있으면서 여러 가지의 시간 감각을 가지고 있는 작중인물 등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Mendilow). 그러나 여기에서는 문학에서 시간 자체가 차지하는 철학적 의미에 대한 깊은 논의는 하지 않을 것이다. 「네 인생의 이야기」에 나타나는 시간은 마이어호프가 제시하는 문학에서의 시간의 제 측면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며, 그가 말하는 시간의 의미에 대해서도 특별히 천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다음에서는 「네 인생의 이야기」에 나타나는 시간적 요소가 이 작품의 구조와 주제 구현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어서 읽기
「네 인생의 이야기」의 구성은 그것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로 하여금 생소함과 당혹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전체 줄거리를 이루는 내용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언어학자인 여주인공(루이즈)이 지구에 나타난 외계인 헵타포드들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과 그녀가 자신의 딸에게 딸의 생애를 회고하듯 들려주는 내용이 병렬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작품의 중반부까지는 두 이야기 간의 연결고리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데다가, 루이즈가 들려주는 딸의 생애는 순차적으로 서술되지도 않아 독자에게 혼란을 안겨 준다. 그러나 이러한 기법은 기술적인 의미에서 ‘과거 회상(flashback)’이나 ‘시간 전위(time-shift)’와는 다르다. 루이즈가 서술하는 딸의 생애는 소설의 허구적 시간에서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과거 회상도, 연대기적 사건의 순서를 뒤바꾸는 시간 전위도 아니다. 이 작품의 시간 서술에서 첫 번째로 기묘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네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네가 말하는 너의 탄생 시나리오를 기억해.
“엄마가 나를 낳은 이유는 단 하나, 월급 안 줘도 되는 하녀를 들이기 위해서야.”
벽장에서 진공청소기를 끄집어내면서 너는 쓰디쓴 어조로 이렇게 말하겠지.(p.140.)
같은 사건에 대해 ‘기억한다’고 말하면서 대해 동시에 ‘~겠지’라는 미래형 문장을 사용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자연스러운 서술이 아니다. 왜 이러한 기묘한 표현이 등장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주인공이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우는 큰 줄거리가 진행되고, 이 큰 이야기와 딸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와의 연결고리가 나타나면서 극적으로 해결된다.
헵타포드의 언어 체계와 문자 시스템에서 루이즈가 밝혀낸 것은 바로 그들의 시간관이 비선형적(nonlinear)이고 공시적이라는 사실이었다. 헵타포드의 문자 체계에서 문자를 이루는 연속된 선들 사이의 순서는 중요치 않다. 다만 그 획들은 연속된 선으로서 별도의 구(句)에 동시에 관여하고 전체적인 문장을 구성하므로, 그는 최초의 획을 긋기도 전에 문장 전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될 지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따르는 지구인의 인과율적인 시간관과는 대조적으로, 헵타포드는 ‘원인’이 있기 전에 ‘결과’를 직관적으로 알며, 그 ‘결과’를 알기 때문에 목적적으로 ‘원인’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다.
헵타포드의 언어를 깊이 이해하게 된 루이즈에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그녀는 소설 속의 객관적 시점에서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이 성장하여 죽기까지의 생애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요절할 딸을 낳기 위하여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 의지의 존재 ― 우리가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결정적인 미래를 알 수 없다는 ― 때문에 미래를 실제로 아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패러독스는 어떻게 풀 것인가? 그러나 루이즈는 미래를 안다는 경험이 인간의 자유의지 자체를 바꿔놓는다고 서술한다. 작중에서 그녀는 수 년 후에 딸에게 상처를 입히게 될 샐러드 볼을 자의로 구입한다.
나는 손을 뻗어 선반에서 샐러드 볼을 집어 들었다. 이 움직임에서 특별히 강요받은 듯한 느낌은 없었다. 그러는 대신 딸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볼을 잡으려고 달려갈 때와 같은 절박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본능적으로 주저 없이 따라야 하는 느낌이다.(p.197.)
비슷한 문제의식이 이영도의 『퓨처워커』에서도 드러난다. 작중에서 미래를 보는 능력을 지닌 여주인공은 자유의사에 따라 고정된 미래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미래를 그대로 실현시키기 위해 애쓴다.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둘이 하나 되길 원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그를 닮은 생명을 가지고 싶어서 아기를 낳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것을 보았고,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 의심이나 회의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녀가 보는 미래는 현실만큼이나 뚜렷하다. 보통 사람들이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는 미래를 부정할 수 없다.(이영도,『퓨처워커』 4권 p.174.)
『퓨처워커』의 주인공은 자신이 정해진 대본에 따라 연기(performance)를 하고 있다고 느끼는데, 이는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루이즈가 경험하는 것과 동일하다. 헵타포드의 언어가 필연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미래의 일을 현실화 ―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예측하고는 있지만 일단 발화되어야만 그것이 현실이 된다는 점에서 ― 하는 역할만을 담당하는 수행적(performative)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시간에 대해 유사한 테마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주제가 『퓨처워커』와 「네 인생의 이야기」의 형식에 미치는 영향은 각기 다르다. 『퓨처워커』는 소설에서 일반적인 연대기적 서술에 의존하며, 다른 등장인물들과 공유하지 못하는 여주인공의 시간 감각이 작품의 시간 감각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는 소설 속에서의 객관적인 시간, 등장인물의 주관적 시간이 모두 동일한 비중으로 나타나며, 그것이 형식 자체에 영향을 미쳐 그 결과가 언뜻 시간 전위와 유사해 보이는 뒤죽박죽인 시간 구성으로 나타난다. 이런 면에서 보면 「네 인생의 이야기」의 시간 구성은 커트 보네거트의 『제5 도살장』의 그것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이러한 차이점이 나타나는 이유는 『퓨처워커』의 미래 예측이 시각적인 것에 비하여 「네 인생의 이야기」의 그것은 ‘직관적인 앎(epiphany)’과 세계관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후략)